살림의 놀이

이천진 목사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인, 천상병님은 ‘귀천’이라는 시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천상병님은 ‘인생은 소풍’이라고 노래하였다. 우리의 집은 본래 하늘인데, 이 땅에 소풍 나왔다는 것이다. 이 땅에 소풍 나와서 기슭에서 신나게 놀다가 구름이 손짓하면 이슬과 더불어 손잡고 노을과 함께 하늘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소풍을 가서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놀이를 한다. 거기에는 계층 간의 대립이나 갈등, 싸움과 전쟁이 없다. 서로를 아름답게 느끼며 서로를 살리는 ‘살림의 놀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아이들은 ‘죽임의 놀이’를 즐기고 있다. 중학교 아이들이 수돗가에서 놀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았더니, 아이들이 잠자리를 잡아다가 물을 먹여 죽이는 것이었다.

  죽임의 놀이인 학교폭력이 사회의 주요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경찰청은 지난 3월부터 4월 12일 현재까지 학교폭력 자진신고를 받은 결과, 가해 학생 2,576명이 신고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진회를 비롯한 폭력 서클 120개를 해체했다고 밝혔다. 경찰청이 학교폭력 자진신고 기간 동안 신고한 학생 중 폭력 서클가입자 71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학생들이 ‘부모가 자주 싸우거나 아빠가 엄마를 때린다(48%)’ 고 답했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86%)이 ‘부모로부터 매 맞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86%) 어린 시절 가정에서부터 ‘폭력의 모델링(따라하기)’이 시작돼 자기도 모르게 폭력이 ‘인지화, 내면화’돼 버리는 것이다.  
  3년 전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던 중학생의 유서가 공개되었다. 이 중학생이 자살한 뒤 아버지가 발견한 유서는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 학교폭력이 한 소년의 인격을 얼마나 철저히 짓밟고 어린 마음을 얼마나 잔인하게 찢어놓는가를 보여준다. 소년은 자기를 괴롭혔던 동급생들의 이름과 괴롭힘 행태를 유서에 나열한 뒤 ‘너희들을 죽이려다 참았다. 귀신이 돼서라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썼다.
  아들의 학교 부적응을 비관해 온 가족이 동반자살했다. 유가족들이 부적응의 원인이 학교폭력 때문이었다며 숨진 가족들의 시신이 담긴 관을 가지고 해당 학교를 찾아가 항의시위를 벌였다. 숨진 이씨의 동생은 14일 오전 충남 H고교를 찾아가 “유품을 정리하다 형님이 교육인적자원부장관 등에게 보내기 위해 쓴 탄원서를 발견했다”며 “탄원서 내용으로 볼 때 형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학교폭력에 시달렸는데도 학교 측이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죽음을 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학교 2학년 혜미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일진회 선배들의 비호를 받던 반 동급생들이 상습적으로 돈을 뜯어 갔다. 혜미는 이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렸다. 어머니는 학교로 찾아가 “혜미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며 학생들을 혼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무서운 폭력이었다. 앙심을 품은 동급생들은 혜미를 일진회에 고자질했고, 일진회 소속 선배 다섯 명이 혜미를 집으로 끌고 가 폭행했다. 코뼈가 부러지고 입술이 터졌다. 혜미의 얼굴이 피범벅이 됐는데도 일진회 선배들은 폭행을 그치지 않았다. 무릎을 꿇게 하고 허벅지에 몽둥이를 끼운 다음 밟아대는 고문을 했다. 그리고 코피가 터져 피가 쏟아지자 “피를 보면 흥분된다”며 폭행을 계속했다. 머리채를 잡고 끌고 다녀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해질 정도로 뽑혔다. 혜미는 병원에서 40일이 넘도록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일진회 선배들은 병원까지 찾아와 “경찰에 신고하면 교도소를 갔다 와서 가족 모두를 몰살하겠다.”고 협박과 난동을 부렸다. 혜미는 오랫동안 대인기피증과 폭식증,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고 두 달 동안 정신과 치료도 받아야 했다.

  아이들은 이러한 ‘죽임의 놀이’를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20세기의 인류는 서로를 죽이는 ‘죽임의 놀이’를 하였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은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라는 무서운 폭력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많은 생명을 죽였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은 환경오염으로 지구 생명을 죽여 왔다. 지구의 온난화로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높아지고, 육지가 바다에 잠기고 있다. 발전과 풍요를 위해 지구를 죽이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 흑인과 백인, 신세대와 기성세대, 북한과 남한, 전라도와 경상도의 대립은 귀중한 생명을 죽이고 있다. 정치인들은 국회에서 논리의 싸움, 정책의 싸움이 아니라, 몸싸움, 물리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 교회도 세습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예배당 안에서 각목이 오고가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이들이 폭력을, 죽임의 놀이를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다섯 살인 현재는 아빠로부터 꽃바구니를 받아들더니,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물을 떠다가 주면서 소리쳤다. “아빠, 아빠, 꽃이 배고프대요, 꽃이 배고프대요.” 현재는 꽃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꽃을 사랑하고 있었고, 꽃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재는 꽃에 물을 주는, 꽃을 살리는 ‘살림의 놀이’ 속에서 마냥 즐거워하였고, 삶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생명을 죽이는 ‘죽임의 놀이’는 우리에게 비극을 가져다주지만, 생명을 살리는 ‘살림의 놀이’는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준다.

  히브리인 70명이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그 생명이 번성하여 이집트 땅에 가득 퍼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가 이집트 사람들보다 더 많고, 힘도 더 강해졌다. 이집트 왕은 히브리인들의 인구증가, 즉 생명의 번성을 경계하더니, 마침내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아 강제노동을 시켰다. 히브리인들은 곡식과 무기를 저장하는 성읍,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억압하면 할수록 히브리인들은 더욱 더 번성하였다. 이집트 왕이 강제노동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손 번성을 억제하려고 한 것은 일에 지쳐서 피곤하게 하여 출산을 줄여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명력을 억압할 수 없었다. 강제노동을 통한 생명의 억압에 실패한 이집트 왕은 두 번째 생명을 억압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것은 히브리 산파들에게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유아학살 명령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씨를 말리는 무서운 폭력이었다. 그런데 ‘십브라와 부아’라는 산파가 왕의 유아학살 명령을 거절하였다. 산파는 ‘히브리 여인들이 이집트 여인들보다 기운이 세서, 자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기를 낳는다’고 왕을 속였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건 생명사랑이었다. 살림의 놀이였다. 이 두 여성이 아니었더라면, 모세도 살아남을 수 없었고, 히브리 민족은 이집트의 노예로 살다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두 여인의 살림의 놀이가 이집트 왕의 죽임의 놀이를 이긴 것이다. 그리고 두 여인의 살림의 놀이는 이스라엘의 해방의 시작이었다.

  예수님의 놀이는 ‘살림의 놀이’였다. 예수님은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움
을 느끼셨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사람을 살리는 ‘살림의 놀이’를 즐기셨다. 산에 소풍 온 사람들에게 생명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살리는 ‘살림의 놀이’였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살리는 ‘살림의 놀이’였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셨다. ‘살림의 놀이’였다. 하루는 기슭에 소풍 온 사람들에게 생명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셨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어느덧 날이 저물고 말았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야기하였다. “각자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죠?” 예수님이 입을 여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기가 막힌 제자들은 물었다. “이백 만원 어치를 사다가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이번에는 예수님이 물었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제자들이 대답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들을 아름답게 느끼며, 살아있는 것들을 끔찍하게 사랑하셨던 예수님은 사람들을 풀밭에 앉게 하신 다음,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 놓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리고 오천 명을 먹여 살리는 ‘살림살이’를 손수 하셨다.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살림의 놀이’였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살림의 놀이의 극치를 보여 주셨다. 자기를 죽이고, 인류를 살리셨다. 죽임의 놀이로 예수님을 죽인 로마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살림의 놀이를 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예수님은 아직도 이 역사 속에 살아있다.    
  
  정호승님은 ‘서울의 예수’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비를 맞으며 울고 계신다.

이천진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목사안수를 받았고  현재는 이화여대병설미디어고 교목으로 사역하고 있다. 이 글은 ICMNEWS에 실릴 글로써 네티즌들을 위해 먼저 올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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