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부인"

Peter's Denial

John. 13:36-38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인간적으로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유다의 배신에 이은 베드로의 부인은 설상가상의 최악의 상황입니다. 가장 신뢰했던 제자로부터의 배신, 그리고 수제자 베드로의 부인, 그것도 일정 기간을 두고 일어난 일이 아니라, 연이어서 발생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정신적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모든 복음서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마26:31-35;막14:27-31;눅22:31-34). 다만 요한복음에서만 가장 짧게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겠다는 예언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간관계의 개연성과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실수를 통해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이와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36)하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베드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아는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예수님만 하셔야 하고 하실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고난,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한 부활의 과정, 곧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 증거와 증표로 부활하는 구속 사역과 그것의 완성을 위한 위대한 계획을 베드로는 전혀 오해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구원의 비밀은 잘못된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구원 계획에 대한 철저한 오해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사실상 이미 심판에 이른 것입니다. 복음이란 바로 이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간단한 진리의 오해로부터 구원은 멀어지며, 급기야 예수를 부인하게 되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오해와 더불어 자의적인 생각으로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이는 소통의 부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확실하지 않으면 분명할 때까지 물어 보았어야 했습니다. 늘 소통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충분히 알지 못한 생태에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면 소통의 비결 혹은 소통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남의 입장에서 듣고 판단하는 습관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를 상담학에서는 페러프레이징이라고 합니다. “되묻기”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일단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고 자신의 말로 바꾸어 되묻는 방식입니다. 그래야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옳은 판단과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화에 있어서도 상대방을 우선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려주는 귀중한 예입니다. 대부분 대인관계의 시작이 말로 비롯되고 말로 마무리 됩니다. 그러니 말로 인해 생기는 오해와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나아지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의욕만 앞세워 실패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 한편으론 더 할 나위 없이 충성스런 제자의 모습입니다. 다른 한편 얼마나 무식하고 멍청한 일입니까? 우리말에도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의욕만 앞세워서 일을 그르치는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총분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항상 기도보다 앞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쁘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말을 핑계처럼, 그리고 기도 못하는 것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고, 바쁠수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하루를 시작하기 전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날은 반드시 마귀에게 끌려 다녀 실패한 하루라고 했습니다. 루터의 말은 우리가 얼마나 말과 행동에 있어서 신중해야 하는 것인가를 알게 합니다.

결론적으로 베드로는 부정확한 지식과 의욕으로 예수님을 부인, 부정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 사건은 베드로의 평생의 상처와 교훈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부정확한 지식은 잘못된 의욕, 결국 참다운 용기가 발휘되어야 할 기회를 빼앗아 갑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훈이자 가르침입니다. 베드로가 부린 호기는 용기가 아닌 무지에서 비롯된 만용입니다. 상황의 정황 증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판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대응해야 하는 지를 결정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불확실한 정보와 지식으로 잘못된 판단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만이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사실입니다.

*2009년 2월 15일 열린 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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